[책 리뷰] 파과 : 생의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생생한 감각.
이 소설보다 과일의 달콤하고 향긋한 내음을 잘 표현한 작품은 보지 못했다. 사실 내용 자체가 굉장히 감각적이고 섬세해서 읽는 내내 계속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소설의 이름은 구병모 작가의 <파과>. 굉장히 보고 싶었던 소설이었지만 3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감이 망설이게 만들었고 결국 영화 개봉 직전까지 와버렸다. 압박감도 물론 있었지만 이런 압박감 덕분에 오히려 책을 빠르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소설의 묘사 자체가 워낙 상세하고 생생했기에 이 이야기가 영화로 어떻게 옮겨질지 상당히 기대됐다. 특히, 이혜영 배우가 표현해 낼 조각은 어떤 모습일까?
조각은 오늘도 방역을 무사히 마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 떨림이 생기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일지도 모를 그 순간에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조각은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할 계획이었다. 조각은 경력이 쌓이는 만큼 나이도 들었고, 이 업계에서는 순발력과 판단력 및 신체 능력까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일을 떠나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은퇴 압력도 커져만 갔다. 겉으로는 대모 취급을 해주었지만 밥벌레 수준의 뒷방 늙은이 취급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거슬리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바로, 젊은 방역업자 투우. 그는 고객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 깔끔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방역하기로 유명했다. 이 업계의 루키이자 블루칩이었다. 그는 조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기 집 할머니 대하듯이 깐족거리며 사사건건 걸고넘어지곤 했다. 젊은 남자와 나이 든 여자의 당연한 힘 차이는 조각이 노력해 왔던 노화가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체감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곤 사사건건 조각의 앞을 막아서며 방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투우는 이러한 일을 벌이는 걸까.
이전과는 다르게 방역업은 범위가 넓어졌다. 이메일과 기사 검색 외에는 인터넷 사용을 하지 않는 조각과는 다르게 요즘의 방역업자들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받곤 했다. 방역의 규칙은 현재나 과거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킬러는 사람을 죽이고 그 진실의 실체를 파헤치지 못하게 흔적 없이 깔끔하게 처리해야 했다. 방역은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가 어떤 이유로 인해 벌레가 되었는지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카프카적 해석이란 프란츠 카프카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로, 그의 소설에서 묘사된 것( 부조리하고 암울한)과 유사한 상황을 의미한다. 관료적 규칙이 초현실적인 악몽을 만들어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조각은 자신보다 작고 가벼운 이를 상대로 싸워본 적이 없을 만큼 왜소한 편이었다. 만만하게 보는 상대인만큼 일반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래서 밀착 접근해서 상대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처리'했다. 조각은 보통 제나이의 노년 여성들과는 다른 근력을 가졌다. 하지만 방역업자로서의 수명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만큼 현역으로 더 활동하고 싶었던 조각은 노력한다. 투우의 방해 공작에 종종 막히지만.
7p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 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누군가 입을 열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고기 누린내와 마늘 냄새 문뱃내에 들숨을 참더라도, 그 냄새가 닷새간의 노동이 끝났음을 알려주기에 안도하는 시간. 과연 내년에도 혹은 다음 달에도, 심지어 당장 다음 주에도 이 시간에 전차를 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존의 불안을 잠깐이나마 접어두는 시간.
사람들 간의 거리감과 심리적인 불안감까지 훑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지하철 속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임산부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던 할아버지와의 상황이나 그 할아버지가 쓰러진 가운데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관심을 떼고 휴대폰 너머의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다. 사람과 사람 간의 신뢰는 사라졌고,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 외에는 정서적 거리감 또한 멀어지고 있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 여러 사건들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의 방관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지독한 무관심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이 장면들은 소설 속에서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철저한 남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타인에게 '관심'과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삶이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기 때문에 관심을 쓸 여력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정이 무서워 '생'을 두려워하던 조각에게 벌어질 일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믿음'보다는 '적대', '의심'이 우선이었던 조각에게 '선의'를 베푸는 이가 등장하며 그녀는 확실히 '변화'한다.
조각은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에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뺨이며 강퍅해 보이는 입술을 가졌다.
방역은 숱하게 해온 일이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21p 누군가의 목숨을 쥐어 터뜨리고 난 뒤의 귀갓길에 살아있는 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충동과 변덕이 편도체를 간질여 이 녀석을 주워 가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또한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무용이었다. (산 것을 데려 오다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도 말한다.) 이 개는 다가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주인의 심리를 파악하여 최선의 거리를 유지하는 센스를 가졌다. 무용은 생것의 온기를 낯설어하고 익숙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조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작업을 마친 뒤 잊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곤 했다. 무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조각은 늘 무용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곳으로 나가 어떻게든 살라고 당부한다.
조각은 점차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된다.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겨나고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돈다. 특정한 이유에 의해 생겨난 일은 아니었지만 영원할 것 같던 일이나 신체가 조금씩 달라지며 마음까지 변화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부속품처럼 취급당하는 자신처럼 누군가도 처치 곤란의 폐기물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녀는 생의 작동 원리를 공유하거나 사소한 희로애락을 누리는 일상을 그려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다음 방역 처리 대상을 처리했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타인의 공허 속에서의 '연민'과 생의 생생함이 그녀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본능이나 공감 능력이 다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211p 나름의 아픔이 있지만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지바른 곳의 사람들,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낼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는 행위가 좋다.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만을 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언감생심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릴 수 있다면. 과육에서 떨어져 나온 사과 껍질 같은 생의 잔여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연민이 망설임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었으며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그녀가 망설일때마다 투우는 그녀를 방해하듯 앞을 막아섰다. 277p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단란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가족 식탁을 엎어놓고 홀연 사라져선 1년에 두어 번쯤 나타나 이것저것 트집 잡고 행패를 부리는 집안의 막내아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아서, 강박사를 바라보면서 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강박사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살려놓는 게 아니었는 데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투우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투우는 푸제르 계열 향수를 뿌리고, 정장 차림에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다.
누군가의 속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각이 20년 동안의 방역 활동을 하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처리'해왔고 소년의 아버지 또한 방역 처리의 일부였다. 그의 행동이 복수에 의한 적개심이 아님에는 틀림없었으나 조각을 향한 무언의 감정은 증오라고 보기엔 어려운 집착으로 변해가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조각이 아닌 손톱의 시절을 알고 있는 소년은 서른세 살이 되어 제거 대신 방역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조각의 흔적을 따라 흘러온 그는 '어쩌다 보니' 조각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조각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현역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녀를 직접 보기 위해 사무실로 직접 출근하게 된다. 그는 130p 그녀의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뺨이며 강퍅해 보이는 입술을 보곤 곧바로 알아본다. 112p 소년은 섬세하게 가루를 낸 약을 받아 들다가 그녀의 얼굴을 꽤 오랜 시간 올려다보곤 했으며, 항상 반드럽게 세팅된 어머니의 대외 학술제용 머리와는 다른 일상의 부드럽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때론 손을 뻗어보고 싶은 충동마저 들곤 했기에, 어떤 충격을 받았든 그녀의 외양을 잊을 리 없었다. 조각은 이미 늙었기에 언제든지 그녀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시하지 않길 바랐다. 자신의 아버지를 한 번에 박살 냈던 여자가 고작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07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일어난 미풍이 창밖에 휘날리는 꽃잎들을 실어 날라 오는 것만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그때가 아른 거린다.
그가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문장은 131p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217p 그 양반 때문에 당신이 일 할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쳤잖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조각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으면 그 서툰 방식으로 자신을 보게 만든다. 조각의 망설임에 방아쇠를 거침없이 당기는 투우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에게 유일한 관심을 쏟아준 조각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조각이 투우에게 '알약을 가루약으로 빻아준' 행위는 아이에게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핍이 있던 투우는 그것을 애정으로 느꼈고 누구에게나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조각이 해니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끄는 모습 "무슨 생각을 멍청하게 하고 있어." 투우는 슬슬 부아가 끓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조각의 눈에서 이기겠다는 생각 없이 가능한 한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모욕 감과 함께 돌연 마음이 고요와 공허로 가득 해지며 그 무게만큼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라는 조각의 말이 투우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7p 하나하나 뽑아서 손가락 끝마다 꽃잎이 피어나면 좀 더 예뻐지겠지. 핏빛보다 고운 빨강, 세상에 다시없으니. 비록 공기에 닿자 거무칙칙해지더라도, 더러워지기에 오히려 깊고 잔혹한 빨강.
218p 그건 오래전에 한창 갖고 놀다 잊었던 장난감을 수년 뒤 다락방에서 뜻밖에 발굴해 낸 아이의 흥분된 눈빛처럼 보인다.
열다섯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평범한 일상을 꿈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첫 번째는 낳아준 부모의 집에서 소녀의 일생이 시작된다. 언니 하나, 영동 셋셋, 막내 남동생 하나. 아빠는 투전이 아니라 멀쩡한 일로 돈을 벌겠다며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곱 평짜리 집에서 근근이 살다 당숙네로 입양을 가게 된다. (말이 입양이지 식모로 더부살이하러 간 것이다.) 딸린 식구가 많은 집에서 먹을 입 하나 덜기 위해 친척네로 자식을 보내는 일은 흔했던 것이다. 당숙모 집은 아들 하나 딸 하나였다. 비좁은 공간에 꽉 끼여서 자던 그 집이 겹쳐 보였다. 소녀는 당숙모 식모살이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빠듯하게 보냈지만 이전보다 훨씬 윤택한 삶에 만족했다. 신분 상승의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류와 조를 만나게 된다. 세 번째 삶의 시작이었다.
'소질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된 첫 살인은 류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시작되었다. 조각은 항상 자신의 가족이이 되어주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앉는 평범한 일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바라선 안 되는 나날, 상대방이 코웃음 칠까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을 말이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매번 스친다. 그녀를 지금의 자리에 오게 해 준 그 사람의 목소리다. 오래된 습관이 될 만큼 류가 옆에 있다면 지적했을 말들을 홀로 중얼거리며 방역을 수행하곤 했다. 그만큼 류는 조각에게 중요한 일부였다. 무척이나 딱딱하게 굴고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으며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던 그 사람. 류와 조는 고마운 대상이었으며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류를 향한 시선은 조를 향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그런 감정이 담긴 불순함이었다. 178p 류에게 의지하고 류가 세상의 전부였다 해도 그에게 느낀 감정은 집착과 애종의 착종에 다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미안할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226p 검은 양복을 입고 흰 띠를 팔에 감은 그의 어깨, 곧은 등과 다리를, 내내 바라봐서 미안합니다. 그 어깨에 손을 얹어보고 싶어서, 등에 뺨을 대어보고 싶어서, 아니 그 모든 것들을 하기 원한다는 열망보다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감촉을 상상해 보아서 미안합니다. 조각의 몸, 자세와 태도는 류의 손길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자세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등 뒤에 선 류의 악력이 몸 곳곳에 남아있었다.)
류가 조에게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않았다. 또한, 점차 규모가 커지는 일, 그리고 깊게 파고들기 시작한 사업이 자신의 가족에게 칼날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방심했던 그 순간들이 지나 그의 아내와 아이는 영원히 액자 속에만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벌어져도 그만둘 수 없었다. (남아있는 인생 내내 죽을 때까지 도망 나니는 것 말고는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류는 이곳을 떠나도 좋다고 말했지만 조각은 옆에 남기로 했다. 243p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깊은 애도. 어떤 구차한 설명이나 합의 과정이 없이 자연스레 그리된 입맞춤도, 깍지로 이어진 서로 다른 두 개의 손도 절망도 슬픔의 진혼행위. 그래서 얼핏 하나가 된 듯 하지만 철저하게 하나가 아닌. 다만 이 순간 죽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현재 견디기 위함과 동시에 눈앞에 살아있는 사람의 호흡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무는 의식. 하여 꿈으로만 그리던 류 옆에 있으면서도 조각은 그와의 밀착을 실감할 수 없었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마음이 허공을 맴돌았다.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라는 말로 그 이상의 관계를 끊어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조각은 가끔 류를 떠올린다. 생전, 주의를 준 사항에 자주 이끌렸지만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342p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그
65세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심지어는 킬러다. 남들은 퇴물이라 부르지만 여전히 솜씨 좋은 킬러. 비현실적이라고 해도 소설이니까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액션도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여러 인물들이 엮여 만들어내는 '마음'의 파찰음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져 매우 인상 깊었다. 생명에 대한 예민한 감각, 나이 듦에 대한 처연한 인식, 그리고 인간적인 연민과 희망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무엇보다 인물의 감정과 신체 감각을 이토록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 낸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이 소설은 첫번째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가 상당히 다르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분명히 서로를 향해 있는 마음이지만 각기 다른 감정으로 바라보고 양방향으로 이뤄지지 않는 마음이 사방에 흩어져 찢기는 그 마음까지가 '파과'의 끝인 것 같다.
파과는 생의 끝자락에서도 인간은 '사랑'하고 '변화'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파과( 破瓜 )는 고사성어 파과지년(破瓜之年)에서 나온 말로 이팔청춘과 같은 뜻이다. (16세 전후) 또, 흠집이 나고 으깨진 과일을 뜻하기도 한다. 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파과는 찐득찐득하고 뭉그러진 만큼 불쾌함을 선사하지만 더 상콤하고 달콤한 내음을 내며 새로움을 펼쳐내기도 한다. 조각의 생은 언뜻 보기에는 파괴되고 망가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익어가는 시간과 다시 피어날 가능성이 숨 쉬고 있다. '파과'는 바로 그 모순과 기적을 품은 단어다. 상처 입고 깨어진 자리에서조차 우리는 또 다른 생명을 틔우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인생의 끝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쾌한 것도 품을 수 있는 힘, 상처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용기야 말로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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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로 돌아온 구병모, “지저분하고 불쾌한 것도 문학의 한 부분” | 빼곡히 할말을 노트에 적어온 구병모 작가. 질문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며 조심스럽게, 노트를 힐끔 열어보며 대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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