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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오뒷세이아 서평

by 인생은 하나의 필름과도 같으니. 202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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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 전, 오디오북과 요약본을 통해서만 접했던 『오뒷세이아』 이야기를 김헌 교수의 완역본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영화로 먼저 이야기를 접한 뒤 원전을 읽으니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에도 미처 알지 못했던 맥락과 인물들의 감정이 있었고, 오뒷세우스가 지나온 긴 여정을 직접 따라가고 나니 『일리아스』까지 원전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759페이지라는 어마어마한 분량과 조금은 읽기 어려운 문장들도 있었지만, 거의 3주에 걸쳐 드디어 완독했다. 한 사람의 귀향을 따라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서사가 단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신과 인간, 명예와 욕망, 환대와 무도함, 가족과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오디세이아가 왜 불멸의 고전인지를 보여주는 이유는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오뒷세이아』는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이후를 비춘다. 트로이아가 함락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지만, 영웅들에게는 그때부터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그리고 전쟁과 그 이후에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는 길이다. 수많은 영웅들이 귀향을 시도했지만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신들의 분노를 샀고,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으로 파멸을 불러왔다. 아가멤논은 고향에 돌아온 뒤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고, 그 복수는 다시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에게 이어진다. 네스토르는 이러한 이야기를 텔레마코스에게 들려주며,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돌아온 이후에도 인간은 자신의 삶과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고통받는 인물은 바로 오뒷세우스다. 그는 칼립소에게 8년 동안 붙잡혀 있었고, 수많은 섬과 바다를 떠돌며 동료들을 하나둘 잃는다. 고향 이타카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동안 그가 얻은 것은 명예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하지만 오랜 방황 끝에 그는 자신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칼립소의 섬에서 불멸의 삶을 제안받았음에도 그가 선택한 것은 이타카였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삶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유한한 삶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단순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읽을수록 그의 고난이 신들의 심술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포세이돈은 자신의 아들인 퀴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만든 오뒷세우스를 극도로 미워했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바다에서 끊임없이 방해한다. 반대로 아테나는 오뒷세우스를 가엾게 여기며 그의 귀향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신들의 뜻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운명을 조금씩 만들어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폴리페모스에 대한 이야기다. 오뒷세우스는 ‘아무도 안’이라는 이름을 이용해 거인의 눈을 찌르고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다. 뛰어난 지혜로 위기를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배에 올라탄 뒤 그는 굳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며 폴리페모스를 조롱한다. 그 순간 폴리페모스는 자신의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오뒷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가 조금만 더 침묵했다면 어땠을까. 이미 위기를 벗어났음에도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을 위해 굳이 이름을 밝힌 순간,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다시 멀어진다. 지혜로운 영웅이면서 동시에 오만한 인간이기도 한 오뒷세우스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뒷세이아』의 영웅들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어도 실수하고, 용감하지만 두려워하며,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욕망에 흔들린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를 비롯한 그들이 ‘인간’, ‘필멸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무도함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폴리페모스, 손님으로 머물면서도 주인의 재산을 탕진한 이타카의 구혼자들,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헬리오스의 소와 양을 잡아먹은 오뒷세우스의 동료들. 이들은 각자의 욕망과 무도함으로 파멸을 자초한다.

 

특히 헬리오스의 섬은 인상적이었다. 오뒷세우스는 동료들에게 절대 소와 양을 건드리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이미 테이레시아스와 키르케를 통해 경고를 들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금기를 깨뜨린다. 오뒷세우스 자신은 직접 소를 죽이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선택으로 결국 그들 모두를 잃는다. 이 장면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무게를 느낀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운명에 이르는 과정까지 모두 신이 대신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경고를 들었음에도 욕망을 선택하는 순간, 인간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파멸에 내던져진다.

 

반대로 『오뒷세이아』의 세계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계속 등장하는 것은 환대였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그가 누구인지 묻기 전에 음식을 내어주고 잠자리를 마련한다. 오뒷세우스 역시 수많은 곳에서 환대를 받는다. 물론 폴리페모스처럼 이러한 질서를 거부하는 존재도 있다. 그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낯선 이를 환대해야 한다는 규범조차 무시한다. 그러고 보면 폴리페모스와 이타카의 구혼자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같은 질서를 무너뜨린다. 한쪽은 찾아온 손님을 잡아먹고, 다른 한쪽은 손님이라는 명분 아래 남의 집을 점거하고 주인의 재산을 탕진한다. 『오뒷세이아』에서 말하는 ‘무도함’은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가까워 보였다. 청동기 시대를 지나는 시대의 격변을 알린다.

 

죽음의 세계를 다루는 하데스의 장면도 인상깊었다. 오뒷세우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아이아스 등 이미 죽은 영웅들을 만난다. 살아 있을 때 누구보다 명예롭고 위대한 삶을 살았던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에는 ‘망자들 사이의 주군보다 산 자들의 농노가 낫다’는 의미의 말을 하는 장면은 특히 강렬했다. 생전의 명성과 죽음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뒷세우스가 끝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진다. 불멸의 명성이나 신과 같은 삶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가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귀향의 이야기에는 오뒷세우스만큼이나 중요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텔레마코스다. 아버지가 사라진 집에서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의 횡포를 바라보기만 한다. 아버지의 재산은 탕진되고, 어머니는 결혼을 강요받으며, 그는 자신의 집에서조차 주인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길을 떠나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만나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설득한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없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이제는 아버지가 없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한다. 신의 도움이 그의 성장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성장을 전부 아테나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아테나가 길을 열어주었다면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간 것은 텔레마코스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의 여정은 서로 닮아 있다. 한 사람은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의 소식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 오뒷세우스가 고향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텔레마코스 역시 아버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타카에서 재회한다. 마침내 부자가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뭉클했다. 긴 시간 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오뒷세우스는 텔레마코스에게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구혼자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벌어지는 구혼자들의 처단은 피에 젖은 잔혹한 복수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무도함이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오뒷세우스가 없는 동안 그의 집을 차지했고, 재산을 탕진했으며,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했고, 텔레마코스를 죽이려 했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자신들이 살아남을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내려놓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맞이한 파멸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오뒷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한 채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오래전 그의 개 아르고스만은 주인을 알아본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죽음을 앞둔 아르고스가 주인을 확인한 뒤 숨을 거두는 장면은 짧지만 이상할 만큼 슬펐다. 사람들은 오뒷세우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르고스만큼은 끝까지 기다렸던 것일까. 그 장면을 지나 오뒷세우스가 마침내 페넬로페와 마주하는 순간까지 가면, 이 긴 이야기가 모험담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페넬로페는 오랜 시간 남편을 기다렸다. 그녀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인물이 아니다.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사용했고, 오뒷세우스가 돌아올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뒷세우스가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략을 사용했다면, 페넬로페 역시 집 안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둘의 재회는 부부의 만남을 넘어서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귀향을 기다려온 두 사람의 만남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긴 여정의 끝에서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4권에 걸쳐 읽어온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다시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정리된다. 그 장면을 읽으며 오히려 지금까지의 여정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폴리페모스, 키르케, 하데스, 세이렌, 스퀼라와 카뤼브디스, 헬리오스의 섬을 지나 결국 이타카에 도착한 한 사람의 이야기.

그 귀향은 장소로 돌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뒷세우스는 여행하는 동안 동료를 잃고, 명예를 잃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그는 자신의 오만 때문에 고난을 늘리기도 하고, 신들의 분노 때문에 길을 잃기도 한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일리아스에서 영웅에게 필요한 건 불멸의 명성이라고 마침표를 찍었다면 오디세이아에선 인간으로서 돌아갈 곳을 찾는 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가장 인간적인 욕망의 귀향.

 

누구나 살아가면서 길을 잃을 수 있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때로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긴 여정 끝에 내가 정말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귀향일 것이다. 759페이지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니 『오뒷세이아』는 한 영웅의 모험담이라기보다, 무엇을 잃고 나서야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알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 하나의 긴 귀향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이렇게 하나의 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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