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무라 아키라는 주도면밀한 취재와 현장 증언, 사료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장편 소설을 집필하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다. 그가 1982년에 발표한 『파선: 뱃님 오시는 날』은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일본 독자들 사이에서 재조명되며 ‘역주행’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이번이 첫 출간이다. 2020년에는 도미니크 리에나르 감독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어둠 속의 불>을 연출하기도 했다.
소설은 바다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17 가구 규모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시작된다. 농사도, 어획도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버텨가며 바닷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뱃님’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사히 도착한 배가 아니라 ‘난파된 배’다. 살아가기 위해 누군가의 불행을 기원해야만 하는 세계. 뱃님이 오지 않으면 가족 중 누군가는 다른 섬에 고용하인으로 팔려가야 했다. 대부분은 여자 아이들이었지만, 집안의 가장조차 생계를 위해 떠나야 할 때도 있었다. 떠난 아내를 향한 의심과 질투가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2년 만에 뱃님이 찾아온다. 화물이 가득한 상인의 배였다. 배의 목재부터 쌀, 술, 초, 차, 간장까지 온갖 물자가 실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배의 생존자들을 모두 죽이고 물건을 약탈한다. 수색을 나선 사람들에게는 흔적을 감춘다. 그리고 며칠 뒤, 또다시 뱃님이 도착한다. 이번에는 붉은 옷을 입은 시신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시체에는 두드러기와 흉터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옷의 붉은색이 길조라고 믿고 그 옷들을 나눠 입는다. "빨면 된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며칠 뒤, 마을에는 끔찍한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기괴하다.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삶의 수단처럼 받아들여지고, 한 사람의 죽음은 입 하나를 덜 수 있다는 식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가난한만큼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것도 맞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선택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법과 질서, 윤리와 도덕은 중요한 것이지만 살아남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규율과 풍습은 공동체를 보호하기엔 너무 오래된 체계였다. 파선으로 연명했던 공동체는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모두가 위험에 빠지는 최악의 결말에 치닫게 된다. 인간은 바닥을 내리 찍을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으며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는다. 소설 속에서 드러난 인간의 불편한 지점을 잔혹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참으로 끔찍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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