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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회 문화 예술

[책 리뷰] 붉은 시대

by 인생은 하나의 필름과도 같으니. 202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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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붉은 시대』는 잊혀진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복원하며,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사회적 논쟁과 깊게 연결된 문제임을 드러내는 책이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을 ‘잃어버린 20년의 붉은 시대’로 규정하며, 한국 현대사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졌던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이 책은 학문적 연구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짐으로서 또 다른 길의 가능성을 사유하게 만든다.

 

저자는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이 외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당대 세계사의 흐름과 식민지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교차하며 탄생한 현상임을 강조한다. 1919년은 전 지구적으로 반란과 격변의 해였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의 충격은 피압박 민족들에게 새로운 해방의 비전을 제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불황과 제국주의 억압은 급진적 대안을 촉발했다. 조선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3·1운동은 민족주의의 한계를 드러냈고,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 계급적·민족적 모순이 중첩되면서 사회주의가 새로운 해법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1925년 창당된 조선 공산당은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 속에서도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제시한 사회 개혁 의제의 급진성이었다. 최저임금 보장, 산업재해 보상, 토지 개혁, 동성애 탈범죄화, 임신 중지 합법화, 유급 출산휴가 등은 지금의 시각에서도 파격적이고 선구적이다. 그들의 목표는 독립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최소 조건을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었다. 특히,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이 자본가와 남성에게 동시에 억압받는 현실을 지적하며, 자유연애를 넘어 ‘동지적 사랑’을 주창했다. 물론 이론적·실천적 한계도 분명했지만 이들의 급진적 사유는 오늘 날 우리가 누리는 여러 권리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해방운동과 깊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과 계급을 분리하지 않고, 사실상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이자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이들은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를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계급 해방을 지향했다. 그러나 박노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민족주의를 비판한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해방적·포용적 민족 개념과 달리, 국가주의적·혈통주의적 성격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책은 과거의 복원이 단순한 학문적 연습이 아니라 현재의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적 개입임을 드러낸다.

 

책은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이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 어떻게 상이하게 계승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북한은 초기에는 토지 개혁, 무상 의료·교육 등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실현했으나, 점차 혈통 중심 민족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로 굴절되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전통이 철저히 탄압되었으나, 그 유산은 민주화와 노동운동 속에서 가늘게 이어졌다. 이 분석은 한국 현대사가 ‘놓쳐버린 기회’의 연속이었음을 드러내며 씁쓸한 성찰을 남긴다.

 

과거의 붉은 꿈이 단순히 유물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현실을 자각하고 내일의 가능성을 여는 질문임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억압된 역사를 복원하는 의의가 크지만 그 과정에서 이상적인 측면이 과장되거나 충분히 분석되지 않은 지점도 있다. 특히 북한과 소련을 ‘적색 개발주의’로 명명하며 사회적 성과를 강조하는 부분은 체제의 억압적 실상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1920~3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급진적 의제를 오늘날의 한국 사회 문제와 단순 병치하는 방식 역시 다소 도식적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여전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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