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사랑니>를 처음 봤을 때,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가? 뻔한 것 같기도? 하는 생각으로 펼쳐보았다. 현실에 너무 찌든 탓인지, 진부하고 뻔한 클리셰에 질린 탓인지 사랑니에 낭만이 붙을 수 있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소설의 전개에 잠이 확 깼다. 제목과도 참 잘 어울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이질감이 들며 잠이 확 깼다.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인 삶에 불교적 요소를 섞어내면서도 달콤하고 찐득한 사탕을 머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순응하고 그 이유에 뻔한 핑계를 댔던 지난날에 대한 자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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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시린이다. 치과위생사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치과위생사로 일하고 있다. 큰 병원에서 일하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퇴사한 시린은 다시 작은 병원에 취업하여 일하고 있다. 1년 만이라도 버티라는 아버지의 말에 과장의 폭언, 선임의 일 미루기, 환자들의 난동을 참아내며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부당함과 불의를 그저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시린이 그럴수록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횡포는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발치 사랑니를 버리러 간 지하 폐기물 센터에서 수보리를 만나게 된다. 사랑니를 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완벽한 사랑니 찾기에 나선다.
나쁜 환자로부터 저를 지켜 주시고 직장 상사를, 혼쭐을 내달라는 소소한 부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삶이 즐겁지 않고 노동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없었던 자기 삶에 활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고 시린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타인의 부정에 눈을 감고 나의 안위를 위해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산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시린의 선택은 한국 사회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했던 부조리한 일들이 가족에게도 들이닥치며 문제의식을 제대로 하게 된 것이다. 시린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낭만은 언젠가부터 허황한 꿈이라고 여겨지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때론 설렘과 열정이 새로운 꿈을 펼쳐내고 성취하곤 하지만 현실 앞에 가로막힐 때가 더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의 시린 또한 여느 직장인처럼 낭만보다는 현실에 순응하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간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보다 평범함이라는 단어에 숨을 수 있는 위치를 선택했고 침묵을 유지하며 그 규칙이 어떤 것이든 따라야 했고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을 그저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결국 피해를 보게 된다. 수보리는 “가시밭길을 걸으면 발은 다쳐도 몸은 앞으로 간 다네. 하나 구정물 속에 숨으면 고통이 없어도 악취에 삼켜질 뿐이니, 그대는 차라리 코를 도려내려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시린 것처럼 그럴싸한 핑계를 생각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어차피 그렇게 사는데 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다 알고 정의를 수호한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게 있겠어? 라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으나 나에게 썩 도움 되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32p ‘수많은 미물 중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의지가 있다. 그것을 존자들은 용기라 일컬었으니, 수보리에게 이러한 회피는 기특하게 보이지 않았다.’라는 말처럼 떳떳하지 못한 삶엔 어떤 편안함도, 정의도 자리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들도 그렇기에 나도 그래도 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니는 존재를 알면 신경이 쓰이지만, 때론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이다. 발치하면 무척이나 아파서 올곧게 자라길 바라지만 대부분 발치의 대상이다. 이런 사랑니에 낭만이 붙는다니 좀 신기했다. 소설에서는 삶을 사랑니에 비유한다. 그렇게 삶의 형태는 자신이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루어져 있다. 저마다의 사랑니를 올곧게 자랄 수 있게 할 것인지, 늦었지만 그래도 잘 가꾸어 볼 것인지, 썩어 문드러지게 방치할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노동 사회에서는 허황한 낭만일지 모를 <낭만 사랑니>의 결말이 한국 사회의 미래가 되어주길 바란다. 어른의 퍽퍽하고 매서운 손에서 달콤한 사랑이 익어가는 그 순간을 맞이했던 소심한 소녀이자 골목대장이었던 시린이 선택했던 것처럼.
인상 깊은 구절
22p 정치적으로 산다는 것은 상호를 알며 살겠다는 의미로, 서로가 서로의 문제를 목격하고 개입할 틈을 내어주는 삶을 말했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철저히 독립된 개인으로 잔존하려면 그 누구의 부조리 함에도 목소리를 내선 안 됐다
27p 죽기 직전 모습이기 도 했다.. 소싯적 건강히 타올랐던 존재의 마지막 순간 이 입안에 닿노라면 슬픔 대신 때때로 감미로운 단맛이 느껴졌다. 삶에 깃들었던 찰나의 낭만들이 설탕처럼 영혼에 코팅돼 있으므로.
30p 투덕거리는 마음들 아래에, 우주를 보존하는 가장 큰 기둥은 언제나 사랑이었으므로.
43 마음도 양치해야 하나요. 어린 시절 먹었던 달콤한 도넛들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사는 탓인지, 어느새 증식한 세균이 마음의 균열을 파고 들어가 소중한 감정을 갉아먹었다.
215 내 인생은 참 이상했어요. 내 생각만 해야 할 땐 남 눈치를 봤고, 정작 남 생각을 해야 할 땐 내 생각만 했어요. 지난날들은 이 사랑니랑 함께 다 가져가 주세요. 당신은 나에게 우주의 귀인이니까."
230p 한때는 그에게도 미움과 의심이 있었다. 그 어두운 것들을 도려내려 애를 써도 마음에는 구멍이 남아 결코 백지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싹은 틔울 수 있었다. 수보리는 구멍에서 자라난 새싹들을 실감했다. 딱 맞는 모양으로 이식한 치아처럼 곁의 살점들과 다정하게 엉겨 붙은 뿌리가 느껴졌다. 그것이 미래에 새 꽃을 피운다면,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세계란 끝내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언젠가 썩어 문드러진다고 하여도, 사는 동안만큼은 온 우주가 살아 있는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뿌리들을 감싸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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